그때의 나를 마주 보다
2025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이 별에 필요한'은 외계 생명체와의 교류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감정과 자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감성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혼자 조용히 감상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였을까?", "언제부터 내 이름을 잊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결혼 12년 차,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 삶의 중심이 저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가족은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엄마',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감정을 눌러놓고, 나의 꿈과 욕망은 언제나 다음으로 미뤄야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이 별에 필요한'은 무심코 덮어두고 있던 내면의 문을 다시 열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수진은 젊은 시절 소설가를 꿈꾸던 감성적인 여성이었지만, 결혼과 육아를 통해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생명체 리안과의 만남은 그녀의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을 가져옵니다. 리안은 인간의 감정을 배우기 위해 수진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며, 수진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래전 묻어두었던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수진이 리안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였던 오래된 서점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서가 사이를 걷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여기엔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과 책, 취미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고 어느 순간부터는 쇼핑도, 영화도, 친구와의 만남도 줄어들었고, 내 취향조차 희미해진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제게 조용히 말해주었습니다. "당신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신의 감정은 아직 살아 있다"고요. 감정을 억누르며 살다 보면 어느새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이 익숙해지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정말 온전한 삶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별에 필요한'은 단순한 이야기지만, 40대 초반 여성으로서의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특별한 영화였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우주
이 영화는 단순한 SF가 아닙니다.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지만, 오히려 그 존재를 통해 우리 일상 속 관계의 본질을 되짚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특히 '가족'이라는 주제는 영화 전반을 감싸는 핵심이자,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진이 리안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감정을 나누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곧 그녀가 가족과의 감정적 단절을 회복하는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수진처럼, 서로를 위해 함께 살아가면서도 언제부턴가 대화는 줄고, 감정 표현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점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무뎌진 것이 사실입니다. 리안이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인간의 감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그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들 듯, 저 역시 영화를 통해 저의 가족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수진이 남편과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대사는 제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순간부터 남편과의 대화가 필요할 때만 이루어지고, 하루 일과나 육아 관련 내용 외에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수진은 작은 용기를 내어 감정을 꺼내고, 그를 통해 가족의 중심이 다시 연결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당신은 언제 가장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어?" 그 질문에 남편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이들 다 재우고, 조용히 나한테 커피 따라줄 때." 그렇게 평범한 대화가 시작되어, 우리는 한참을 웃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아주 사소하지만 따뜻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서로 확인하게 되었던 시간입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가까운 만큼 더욱 쉽게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매일 함께 있다는 이유로 감정을 나누는 것조차 게을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조용히 말해줍니다. "가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돌보고 이해해야 하는 작은 생명체처럼 소중한 존재"라고요. 관계는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지고, 관심을 주지 않으면 메마릅니다. '이 별에 필요한'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깝지만 때때로 낯선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감성적인 영화입니다.
이 별에 필요한 건, 결국 사랑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의미일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지금, 그 제목은 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문장입니다. 이 별에 필요한 것, 그것은 화려한 기술이나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본질적인 감정,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리안은 인간의 감정을 배우기 위해 수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요?"였습니다. 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합니다. "사랑은, 네가 없어지면 내가 아플 것 같은 마음이야." 이 짧은 대답은 영화의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듯 깊이 와닿았습니다. 사랑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를 연결해 주는 감정이며,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라는 것을 영화는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사랑은 종종 거창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말합니다. 사랑은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 때론 침묵 속에서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라고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던 저는, 이 영화를 본 이후로는 그 말을 더 자주 꺼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아이들이 웃으며 대답해 주는 모습을 보며 왜 지금껏 그 말을 아꼈는지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감독의 연출 또한 매우 섬세했습니다. 화려한 시각 효과나 과장된 감정 표현 없이,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을 전달했습니다. 배우 김선아는 수진이라는 인물의 고단함과 변화의 순간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표현해 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줍니다. 결국, '이 별에 필요한'이라는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별에서 진짜로 필요한 건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답은 이 영화를 본 누구든, 각자의 방식으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답이 사랑이었고, 그것이 다시 제 일상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