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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줄 위에 남겨진 나의 젊은 날, 감춰진 허기, 가면 뒤에서 마주한 진짜 나

by dall0 2025. 8. 1.

[왕의 남자] 줄 위에 남겨진 나의 젊은 날, 감춰진 허기, 가면 뒤에서 마주한 진짜 나
[왕의 남자] 줄 위에 남겨진 나의 젊은 날, 감춰진 허기, 가면 뒤에서 마주한 진짜 나

 

 

줄 위에 남겨진 나의 젊은 날

 

2005년 겨울, 세밑의 바람이 유난히도 차갑던 어느 날, 저는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습니다. 두 돌을 갓 지난 아이를 재우고, 남편에게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라고 말해두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육아와 집안일로 지쳐 있던 저는 그저 잠깐의 숨을 고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기대 없이 앉았던 극장에서 만난 영화가 바로 '왕의 남자'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줄 위를 걷는 광대들의 모습이 화면에 펼쳐졌을 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공길과 장생, 두 광대의 눈빛 속에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뇌가 묻어 있었고, 저 또한 그들의 감정선에 어느새 깊이 이끌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배우 이준기의 공길은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긴 머리카락과 깊은 눈매, 그리고 흔들림 없이 그려낸 감정은 현실에서 지친 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늘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로 살아야만 했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은 먼지가 쌓인 거울처럼 잊고 있었습니다. 공길의 눈빛을 보며, 장생이 무대 위에서 쏟아내는 열정을 보며, 나는 내 삶을 언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봤던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는 모습은 제게 결혼생활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현실이라는 줄 위에서, 감정과 책임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살고 있는 제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영화 '왕의 남자' 속 광대들의 흔들림은 제 일상 속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광대를 가볍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세상을 비추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그 슬픔이 제 마음속 오래된 설움과 맞닿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허기

 

연산군은 영화 '왕의 남자' 속에서 매우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폭군이자 왕이면서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외로움과 결핍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공길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내어주고, 집착하듯 곁에 두려 했던 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연산군의 눈빛에서 사랑에 굶주린 아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는 궁궐에서, 공길은 유일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공길 역시 연산군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어떤 파국을 부를지 너무도 잘 알았기에, 그는 한 발짝 물러나 있었던 듯합니다. 영화 속에서 공길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연산군이 보여주는 사랑은 다정한 손길이 아닌 소유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자기애에 가까웠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문득 제 결혼생활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나 역시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랑은 점차 책임이 되고, 책임은 곧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득문득 외로움이 스며들곤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은 그 공허함. 아마 연산군도, 공길도, 장생도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중이고,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놔두는 것임을 '왕의 남자'는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장생이 공길을 끝까지 지켜주려 했던 마음, 공길이 장생을 위해 연산군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말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한 감정이 아니었을까요?

 

가면 뒤에서 마주한 진짜 나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광대들의 이야기는 점점 더 진지하고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를 품게 됩니다. 단순한 웃음을 주던 이들이 왕 앞에서 연극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자존심, 그리고 무대에 대한 신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걸고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모습은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였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이었습니다. 결혼 후 저는 한동안 '나'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잊고 살았습니다.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역할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갔고, 어느 순간 제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시간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길과 장생이 무대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잊고 있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나도 예전엔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춤을 추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 속 광대들은 결국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연기하고, 웃음을 남기고, 그 끝에서 자유를 선택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울었습니다. 세상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했는가, 얼마나 내 진심을 표현하며 살아왔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무대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광대라는 것을요. '왕의 남자'는 단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 존재의 의미, 그리고 삶의 자세를 진지하게 묻는 작품입니다. 지금의 나처럼, 한때 꿈을 가졌지만 현실 앞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안겨줍니다. 이처럼 '왕의 남자'는 40대 초반의 제게 깊은 사색과 감정의 파동을 안겨준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족과 사회라는 이름 아래 감춰두었던 진짜 나를 마주하게 해 주었고,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지금 당신도, 무언가에 지쳐있고 공허함 속에서 위로를 찾고 있다면, 조용한 밤 이 영화를 천천히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당신의 마음속에도 고요한 울림이 번져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