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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남겨진 계절의 기억, 침묵 속의 단절, 조용한 성장

by dall0 2025. 7. 26.

 

 

잊힐 듯 남겨진 계절의 기억

 

2001년에 개봉한 영화 '봄날은 간다'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는,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 영화는 아주 담담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스무 살 시절에 봤던 이 영화는 그저 아련하고 슬픈 로맨스로만 기억되었지만, 지금 40대 초반의 기혼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니 그 감정의 결은 훨씬 깊고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 감정의 조율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사랑은 마냥 설레고 아름다운 감정만이 아니라, 때로는 지치고 흔들리는 감정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그런 복합적인 감정의 흐름을 담백하게, 그러나 가슴 시리게 그려냅니다. 극 중 상우(유지태)는 다큐멘터리 녹음 기사로 일하며,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가 사랑하게 된 이는 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 은수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상우에게 다가옵니다. 처음엔 그녀의 자신감 있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점점 멀어지고, 결국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별을 선택합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별은 눈물과 오열, 오해와 갈등이 있는 드라마틱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과장이 없습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끝나는 순간도 무척 조용하고 담담합니다. 그리고 그게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치 우리의 결혼 생활처럼 말입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어느 날 문득 서로의 눈빛이 달라지고, 말수가 줄어들고, 마음이 멀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현실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변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영화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변하지만, 그때의 진심은 진짜였다"고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습니다.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흩어진 감정 그리고 침묵 속의 단절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흐름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설레고 따뜻했던 감정들이 어느새 무뎌지고, 특별한 갈등 없이도 서로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면, 우리는 결국 마음속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봄날은 간다'는 바로 그 감정의 틈을 아주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영화 속 은수는 상우에게 처음엔 먼저 다가옵니다. 전화도 먼저 걸고, 데이트를 제안하고, 사소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상우는 그런 은수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다가온 은수의 마음이 먼저 멀어집니다. 그 변화는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조용하게, 마치 바람이 방향을 틀 듯,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상우는 점점 불안해지고, 왜 그녀가 예전 같지 않은지를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습니다. 결국 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은수는 이별을 고합니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결혼 초기에 겪었던 감정의 변화를 떠올렸습니다. 어느 날 남편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지고,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은 것 같고, 나 역시 그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게 되던 그 시간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둘 사이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별의 이유를 찾고 싶어 합니다. 누가 변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진짜 같습니다. 사랑의 끝은 종종 이유조차 설명되지 않기에 더 아프니까요. 결혼한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이 영화 속 침묵의 단절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이 생겨도 대화가 줄어들고, 피곤해서 말을 아끼고, 아이 때문에 미뤄둔 이야기가 결국 미뤄진 채로 사라지는 과정을 우리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는 건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 속에서도 인간은 조금씩 성장하고, 결국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했던 시간, 감정을 숨겼던 시간들 모두가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우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됩니다.

 

다시 나를 마주하는 조용한 성장

 

사랑은 끝나도, 삶은 계속됩니다. 이별이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게 됩니다. '봄날은 간다'는 이별 이후의 삶을 그려내며, 그 속에서 성장하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용히 비춥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상우는 다시 자신의 일을 이어갑니다. 녹음을 위해 자연을 찾아다니며 바람 소리, 새소리를 담고, 때로는 혼자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누군가와의 사랑은 끝났지만, 그는 그 감정을 기억한 채 살아갑니다. 상처를 지우지 않으려는 듯한 그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40대가 된 지금의 나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와 나눈 감정이 끝났다고 해서, 그 순간이 아무 의미 없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합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깊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 준 관계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결혼 후 우리는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남편, 아이, 가족의 삶을 우선시하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은 뒤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옵니다.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감정이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다시 나를 찾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출발점을 부드럽게 응원해 줍니다. 무너지지 않고, 천천히 일어서며, 자기 삶을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