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본 '밀양'
20대였던 그때는 '밀양'이 낯설었습니다. 아들의 죽음, 신을 향한 분노, 세상과의 단절 같은 것들은 그저 먼 이야기처럼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상상은 할 수 있었지만, 그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삶은 여전히 반짝였고, 세상은 노력하면 보답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40대가 된 지금, 삶의 크고 작은 상처를 하나둘 몸에 새긴 뒤 다시 본 '밀양'은 전혀 다른 영화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아픔을 겪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밀양'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삶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설명할 길 없는 고통과, 아무리 버텨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은 뒤, 어린 아들과 함께 밀양이라는 낯선 도시로 내려갑니다. 그녀는 새로운 출발을 꿈꿨습니다. 작은 피아노 학원을 열고, 이웃들과 친해지며, 다시 삶을 일구어 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믿었던 세상은 그녀에게 다시 가장 잔혹한 배신을 안깁니다. 아들이 납치당하고, 끝내 살해당하는 비극이 신애를 덮칩니다.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신애는 무너집니다. 그녀는 신을 붙잡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자신을 붙들어줄 구원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신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 절망의 침묵은 신애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신애가 죽도록 미워하는 가해자가 신에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회개했다는 이유로, 그는 신 앞에서 죄를 사함 받고 평온을 얻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환한 얼굴로 평안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신애는 다시 한번 철저히 부서집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 또한 마음 한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우리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함을 수없이 마주합니다. 선한 사람들이 먼저 상처받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한 사람이 실패하는 모습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누구보다 쉽게 평안을 얻고, 어떤 이들은 끝없이 고통 속에 남겨집니다. '밀양'은 그런 삶의 부조리와 냉혹함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눈물로 포장하거나 억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냉정하게 인간의 상처와 외로움을 보여줍니다. 신애는 결국 무너집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함부로 연민하거나 구원하지 않습니다. 신애는 다시 일어서지도 않고, 완전히 절망 속에 가라앉지도 않습니다. 그저 살아갑니다. 깊은 상처를 품은 채, 상처와 함께 존재할 뿐입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진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상처란, 때로는 아물지 않은 채로 우리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흐릿해지지 않는 아픔,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를 우리는 모두 안고 살아갑니다. 20대였던 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40대가 된 지금, 저 역시 삶에 새겨진 수많은 작은 상처들을 통해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밀양'은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꺼내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아픔의 무게, 인간 존재의 연약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일의 고귀함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
'용서'라는 단어는 종종 아름답게 포장되어 우리 곁을 맴돕니다.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들은 마치 인생의 진리처럼 반복되곤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말들이 또 다른 부담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마치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또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죠. 영화 '밀양'을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말 용서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픔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녀는 기도하고, 믿음을 통해 상처를 이겨내려 합니다. 자신을 구원하고자 필사적으로 애쓰죠. 그러나 범인을 직접 마주한 순간, 신애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용서하고 싶어 했지만,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용서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었고, 때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역시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때로는 오랜 시간 쌓여온 오해와 거리에 상처받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는 말했습니다. "이해하고 넘겨야 해." "다 너를 위해서야." "잊어야 네가 편해." 그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잊으려 하면 할수록 상처는 더욱 선명해졌고, '나는 왜 이렇게 쪼잔할까', '왜 이렇게 마음이 좁을까'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저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상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해도, 여전히 아파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억지로 용서하려고 애쓰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괴롭게 만들 때도 있다는 것을요. '밀양'은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전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그 불완전한 마음까지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신애는 결국 완전한 용서도, 완전한 구원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살아갑니다. 상처를 안고, 절망을 껴안고, 때때로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용서하지 못해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인정하고, 불완전한 나를 품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 아닐까 생각합니다. 용서는 선택일 뿐 의무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도,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모든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억지로 용서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조용히 다독이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제는 생각합니다. 모든 상처가 치유될 필요는 없다고. 모든 아픔이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상처를 지닌 채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아픔을 껴안은 채로도 우리는 사랑하고, 웃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저는 조금 덜 힘들어졌습니다. 억지로 행복해지려 하지 않고, 억지로 과거를 미화하려 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이해하고 품어주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따뜻한 치유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세
'밀양'을 보고 나서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는 느낌을 오래도록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 무게는 단순히 영화의 슬픔이나 비극적인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상실을 통해, 저는 내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묻고,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우리 존재의 일부분이자, 삶의 진실이라는 깨달음을 줍니다. 주인공 신애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아내로서 극심한 상실을 겪습니다. 아들을 잃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신을 향한 믿음마저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갑니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으며, 또 그렇다고 다시 일어서는 것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애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저는 삶이라는 것이 사실상 그렇게 복잡하고도 간단한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은 상처를 지닌 채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신애의 삶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상처와 함께 살아갑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아픔, 슬픔,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놓쳐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마주해야 하는 상처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 사실은 단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 저는 조금 더 명확하게 삶의 진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들을 잃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 쌓입니다. 그런 상처들이 쌓일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하게 만드는 것임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단단함은 결코 강해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면에서 자아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힘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때, 그 안에서 진정한 강함이 만들어진다고 믿습니다. '밀양'은 완벽한 구원이나 해피엔딩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애처럼, 혹은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대로, 우리는 매일 이 질문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상처가 너무 깊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동시에 더 많은 이해와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을 껴안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신애처럼, 저도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저를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는 제 삶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더욱 강한 자신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상처를 품고 살아가지만, 그 상처가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삶은 상처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성장하고, 결국은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세상과도 더욱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진실된 삶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치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밀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묻고, 그 끝없는 질문에 답을 찾게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이유는 그 상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우리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임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와 함께,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