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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흑백의 스크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오늘을 사는 나에게

by dall0 2025. 6. 4.

[동주] 흑백의 스크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오늘을 사는 나에게
[동주] 흑백의 스크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오늘을 사는 나에게

 

 

흑백의 스크린, 한 편의 시로 다가오다

 

세월이 흐르니 영화도 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장면은 구절처럼 되새김질되고, 어떤 대사는 한 줄의 시처럼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갑니다. 영화 '동주'를 처음 보았던 때가 2016년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의 삶을 두 시간 남짓한 흑백 화면 속에서 마주했습니다. 당시에는 그의 청춘과 고뇌, 시적 감수성에 깊이 감탄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 감정은 어쩌면 어리고 순진한 연민의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청춘', '슬픈 시대의 시인'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해 버렸던 것이죠. 하지만 올해 봄, 40대가 되어 다시 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는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이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주는 깊이는 생각보다 놀라웠습니다. 어머니로서,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다시 본 윤동주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묻게 하는 질문처럼 다가왔습니다. 그가 써 내려간 시 한 줄 한 줄이 이제는 어떤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고통의 고백이자 다짐처럼 들렸습니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정제된 흑백 화면은 색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감정을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윤동주의 모습은 화려하거나 영웅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때론 무력하게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 조용히 퍼져 나오는 깊은 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없이 숨을 고르게 만듭니다. 정적 속에 흐르는 감정, 말보다 강한 침묵. 그것이 영화 '동주'의 진짜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시인이라는 존재를 낭만적으로 상상합니다. 자연을 노래하고 사랑을 읊조리는 존재로요. 하지만 이 영화 속 윤동주는 그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인물입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며, 식민지 조국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시인. 그런 그를 보며 저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이나 행동의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고민과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죠.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일과 조용히 견디는 일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윤동주는 대놓고 저항하거나 투쟁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섰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고요하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존재를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기록하는 자의 자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누군가는 외치고, 누군가는 써 내려가며, 또 누군가는 묵묵히 삶을 견딥니다. 윤동주는 그중에서도 가장 고요한 저항을 택한 이였습니다. 영화 '동주'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한 편의 시였습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흑백의 정서,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윤동주의 고요한 절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이 누군가의 삶을 위로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때론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울림이야말로 진짜 '시'의 힘이 아닐까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 안에서 찾은 나의 자화상

 

영화 '동주' 속 윤동주의 시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대를 살아간 한 청년의 고뇌이자, 억압과 불안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붙들고자 했던 청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자화상', '서시', '십자가' 같은 시편들은 저에게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신념을 품고,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4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의 저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느덧 제 삶도 중년의 한가운데에 도달했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익숙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가족의 식사를 챙기고, 일터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일. 겉보기엔 단단하고 견고한 일상이지만, 때때로 문득문득 삶이 마모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이 유독 가슴 깊이 스며듭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짧고도 묵직한 문장은 지금을 살아가는 제게 일종의 삶의 표준이 되어줍니다.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 앞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했고, 자신의 나약함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하련다." 그 진실한 태도는 오히려 용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저는 지금, 매일 아침 아이를 깨우고, 학교에 보내고, 다시 일을 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 모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때때로 나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과 기대, 그리고 희생. 그 안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의지는 자주 외로워집니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그런 저에게 말합니다. "자신을 직면하라. 흔들리더라도 정직하게 살아가라." 저는 그 말이 거창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작고 조용한 실천의 말로 들립니다. 말없이 나를 내려놓고 가족을 돌보는 일, 때로는 억울하고 힘들어도 감정을 삭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영화 '동주' 속 윤동주는 스스로를 '비겁하다'라고 자책했지만, 저는 그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용기'라고 느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사람만이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우리 역시 여전히 스스로를 성찰하며 버티고 살아갑니다. 무언가를 바꾸기엔 너무 작고, 모든 것을 다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삶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마음. 저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힘이라고 믿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저는 오늘도 묻습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가?" 그리고 조용히 대답합니다. "네,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나를 잃지 않았다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 '동주'가 전한 시선

 

영화 '동주'를 본 뒤 며칠 동안 마음이 깊게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스크린을 통해 만난 윤동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시에 담긴 고뇌와 순결함이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감정을 안고 집에 돌아온 날, 저는 자연스럽게 책장 깊숙이 꽂혀 있던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꺼내 들었습니다. 아이가 잠든 밤, 조용한 거실에 앉아 시 몇 편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먼지 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언어는 작고 낮았지만, 울림은 깊고 컸습니다. 살아가면서 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할까요? 영화 '동주' 속 윤동주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품은 이상과 신념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 속에는 조국의 고통과 개인의 번민,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입니다. 나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인가? 윤동주는 그저 한 시인이 아닙니다. 그는 시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 청춘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남긴 존재입니다. 그의 시 한 줄 한 줄은 마치 조용한 울림처럼 마음에 남아, 우리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단순하지만 진실한 문장은 윤동주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짧고도 강하게 말해줍니다. 영화 '동주'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거나 한 시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삶 앞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가?' 윤동주의 이야기는 우리 각자에게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고,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하는 이정표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삶의 방향을 가다듬었고, 소음 속에 잊고 지냈던 내면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 감동은 단지 저 개인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며, 윤동주처럼 말보다 행동으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도 더 따뜻하고 정직한 언어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지만, 그 하루가 쌓여 결국 우리의 삶을 만듭니다. 그래서 윤동주가 말한 ‘부끄럽지 않은 삶’은 단지 거창한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상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화 '동주', 그리고 윤동주의 시는 우리 모두에게 거울이 되어 줍니다. 그것은 소리 높여 외치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품은 마음으로, 더 성찰적인 하루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윤동주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