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되는 물음표, 고요한 파장이 일어난 순간
요즘처럼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 한 편을 만났습니다. 2022년 개봉한 '다음 소희'. 이 작품은 마치 뉴스를 보듯 사실적으로 다가왔고, 그 여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저는 평범한 40대 여성으로서, 일상 속에서 가족을 돌보고, 사회생활을 병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제 삶의 위치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단순한 ‘학생 실습’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투명한 거울이었고, 어쩌면 제 아이가 겪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풍경이었습니다. 소희는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웃고, 때로는 장난도 치며 살아가는 밝은 아이였지만, '현장실습'이라는 시스템 아래에서 점점 무너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현장에 들어섰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단지 한 명의 실습생이 아니라, 업무를 대신할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받았던 그녀는 점점 말수가 줄고,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천천히 기울어가는 배를 지켜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는 이 과정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백하고 차분하게, 현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 속에 깃든 진실은 날카롭고 뼈아팠습니다. 소희가 겪은 고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스템의 무관심, 어른들의 방관, 책임 없는 구조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었던 어른들마저도, 눈앞의 이익과 관습 앞에 침묵하거나 눈을 돌렸습니다. 저는 소희의 이야기를 보면서 단지 한 청소년의 슬픈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본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 누구도 이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은 곧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신호를 읽어주고 있는가?'로 이어졌습니다. 나 또한 어떤 순간에 누군가의 침묵을 무심코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한 편의 영화는 나에게 셀 수 없는 물음표들을 던져주었고, 나는 그것을 마주한 채 묵묵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표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내 아이가 말없이 힘들어하는 건 아닌지, 직장에서 마주치는 누군가가 고통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제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음 소희'는 단순한 영화 그 이상의 경험이었습니다. 소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사회를 비추고, 개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매우 조용하지만 강력했습니다. 말없이 던진 그 물음표 하나가, 제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일깨우고, 다시금 ‘듣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나는 얼마나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그 조용한 파동이 여전히 제 안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구조, 현실이라는 이름의 무관심
영화 '다음 소희'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단순히 한 소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눈물과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정할 만큼 명료하게,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 구조는 개인의 선의나 노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단단히 고착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청소년은 점차 사라져 가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영화 '다음 소희' 속 주인공 소희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학생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장실습에 임하지만, 실습의 공간은 결코 배움의 장이 아닙니다. 그곳은 오직 성과와 효율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장이었습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사라지고, 대신 일꾼으로서의 역할만이 요구되는 곳. 소희는 말 그대로 노동의 한 축으로 기능할 뿐이었고, 그녀의 감정, 피로, 고민은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배제됩니다. 그 모습은 곧,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사실보다는, 당장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시선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영화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묻고 있습니다. 저 역시 직장생활을 하며 수없이 '성과와 효율'이라는 단어를 들어왔습니다. 회의 시간마다, 연말 평가에서, 일상의 대화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단어들이 오갔습니다. 하지만 충격적 이게도, 그 언어가 이제는 아직 사회에 발도 제대로 들여놓지 못한 고등학생들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들을 보며, 저는 불현듯 생각에 잠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버텨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힘들어도 참고 견디라고,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요구였는지 성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특히 그 대상이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일 때, 그 말은 조언이 아니라 방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는 소희를 둘러싼 여러 인물과 기관들을 보여줍니다. 교사, 학교, 실습 기업, 정부 기관. 겉보기에는 모두 소희를 도와주고 있는 존재들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녀가 고통을 호소할 때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소희를 진심으로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각자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그저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며 문제를 넘깁니다. 마치 서로의 책임이 아닌 척, 조금 더 무사히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라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이처럼 영화 '다음 소희'는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보여줍니다. 현장실습이라는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학생들에게 현장 경험을 제공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는 구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의 문제를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방관하는 어른들의 태도입니다. 아이의 이상신호가 반복되는데도, 그 신호는 무시되고, 급기야 그녀가 무너지게 되는 순간까지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결국 소희의 죽음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무관심과 책임 회피로 점철된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해야 마땅합니다. '다음 소희'가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영화적 상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실습 현장, 교육 현장, 가정, 또는 거리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구조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현실을 너무나 무심히 지나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영화를 통해 저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어른,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 사회. 그 기본적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다음 소희'는 단순한 추모의 영화가 아닙니다. 그건 지금 이 사회의 경고이며, 외침입니다. 누군가가 다시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이어져야 할 행동, 침묵하지 않는 용기
영화 '다음 소희'를 보고 난 뒤,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먹먹했습니다. 단순한 감정의 여운을 넘어, '이제는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강한 다짐이 생겼습니다. 영화는 전형적인 해피엔딩도, 명확한 결말도 주지 않습니다. 소희의 비극은 설명되지 않은 채, 마치 관객에게 '그다음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소희의 다음은 결코 같은 고통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건 시스템의 문제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책임을 멀리 떠넘깁니다. 하지만 시스템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바로 우리 자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느냐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작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아이가 무심코 내뱉는 말속에서 신호를 포착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조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외면하지 않는 것. 어쩌면 이런 일상적인 관심과 태도가 바로 변화를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지만, 이런 작은 용기들이 모여 결국 커다란 흐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 속 형사의 집요한 추적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녀는 소희의 죽음을 단순한 사건으로 끝내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들춰냅니다. 이를 통해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나 불운이 아닌, 우리가 방치해 온 시스템의 병폐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녀의 끈질긴 질문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왜 아무도 막지 못했는가?' 저는 그 형사의 모습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 모습은 결국 한 사람이 가진 용기와 책임감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침묵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목소리를 내는 사람. 우리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다면, '다음 소희'는 비극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용기 있는 어른입니다. 단지 말로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어른. 부당함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픈 진실 앞에 눈을 감지 않는 어른. 그런 어른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소희처럼 외롭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어른인가요? 저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나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행동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침묵하지 않는 용기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키는 어른이고 싶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