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청춘을 마주한 어느 날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됩니다. 아침밥 준비, 청소, 장보기, 저녁 준비까지. 이따금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분명히 나인데, 예전의 나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본 영화 한 편이 이처럼 익숙해져버린 제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2019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입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그리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감정의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홍장미'는 1970년대 젊은 날의 가수 지망생이었고, 현재는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의 지난 청춘을 꺼내어 조심스레 펼쳐 보이듯이 흘러갑니다. 저 역시 20대에는 꿈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책을 좋아했고, 언젠가는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는 소망도 있었지요. 하지만 결혼과 육아, 사회적 역할에 밀려 그 꿈은 어느새 흐릿해졌습니다. 홍장미의 이야기를 보며 저 자신이 자꾸만 오버랩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놓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장미는 우연한 계기로 과거를 마주하게 되고, 그 속에서 억눌러왔던 자아와 감정을 하나하나 복원해갑니다. 영화는 단순히 회상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지금의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질문합니다. 40대 초반의 나이,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오며 잊고 지낸 제 이름을 영화는 다시 꺼내어 불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인생 영화가 아니라, 여성에게 자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족의 뒤에 가려진 나의 이야기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엄마'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졌고, 남편의 아내로, 아이들의 보호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 이야기는 점점 뒷전이 되었고, 어쩌면 포기해버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 이름은 장미'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끄집어냅니다. 홍장미는 딸 '현아'와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갈등은 단순히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감정의 골이 있고, 특히 딸은 엄마의 과거를 알지 못한 채, 현재만을 보고 판단하려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와 딸 사이에도 가끔 오해가 쌓이고, 대화가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엄마가 되면서 내 감정을 숨기고, 아이의 감정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점점 제 감정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말합니다. 엄마도 하나의 인격체이며, 한때는 꿈 많던 소녀였고,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였던 사람이라고요. 장미가 자신의 과거를 딸에게 조금씩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는 장면은 제게도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너무 오래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장미가 용기 내어 무대에 서는 순간은 단순한 영화적 클라이맥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묻어둔 자아가 다시 세상에 나서는 장면이며, '나'라는 이름을 되찾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이 장면은 제게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써도 된다고요.
잊고 있던 내 이름을 다시 불러준 영화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오래 남았던 것은 바로 제목이었습니다. '그대 이름은 장미'. 이 짧은 문장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됩니다. 학생, 직장인, 아내, 엄마, 며느리, 하지만 정작 나의 이름, 나만의 이야기는 점점 희미해지고 맙니다. 영화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그 이름을 다시 불러줍니다. 장미는 그 이름으로 무대에 서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모두의 꿈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본 후,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글쓰기 노트를 다시 펼쳤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군가가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요. '그대 이름은 장미'는 특별한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지금의 당신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과거의 꿈을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특히 40대 초반의 저와 같은 기혼 여성들에게 이 영화는 위로이자 격려입니다. 우리 삶이 단지 가족을 위한 헌신의 연속이 아니라, 여전히 '나'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추억에 젖는 작품이 아닙니다.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남은 인생을 더 풍요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게끔 동기를 부여해주는 작품입니다. 만약 요즘 삶이 무기력하고, 지루하며, 잃어버린 나 자신이 아득하게 느껴진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드립니다. 당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줄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도 잊고 있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